지난 달에는 흑산도를 찾아가, 외롭고 쓸쓸하게 16년이나 유배생활을 하다가 끝내 해배되지 못한 채,  뭍에 오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손암 정약전의 유배지를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고독, 그분의 신산했던 삶, 그분의 높고 넓은 학문을 생각하면서 감정이입으로 인한 절절한 외로움에 젖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를 살펴보면, 정약전에게 있어서의 긍정적이거나 희망적인 일은 강진에서 귀양 살던 아우 정약용의 편지를 받아 읽는 재미와, 그 편지에 답을 쓰던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요즘 다산문집의 말미에 필사본으로 기록된 손암이 다산에게 보낸 답장 13편을 읽으면서 그분의 박학한 학식과 개혁적인 안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1811년 음력 9월 6일자로 보낸 편지가 특별히 눈에 띄었습니다. 다산이 『논어고금주』를 저술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해석을 단 내용의 일부를 형에게 보냈는데, 그걸 읽고 보낸 답장인 듯 합니다. “지난 겨울에 답해준 편지에는 전에 얻지 못했던 것으로 새로 들은 것이 매우 많았네. 앞전에 혼자서 얻어낸 바이지만 그대의 의견과 부합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네. 우리 두 사람은 한 핏줄에 함께 배웠으니 있음직한 일이나, 눈동자는 각각인데 어떻게 그렇게 같겠는가.

그중에서도 가장 기기묘묘한 일로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것은 「안연문인장(顔淵門仁章)」이라네. 나는 그날 아침에 우연히 『논어』를 읽다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는, 혼자서 환호작약했는데, 그날 해가 지기 전에 그대의 편지를 받았네. 책을 펴보니 새로운 뜻으로 해석한 내용이 어쩌면 내가 해석한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는 내용이었네. 곧바로 그대의 손을 붙잡고 싶고, 등을 두드리면서 ‘내 아우, 내 아우!’ 라고 부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으니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안연(顔淵)이라는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인(仁)에 대한 질문을 하자 공자가 “인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을 하는 일이다.” 라고 답한 부분인데, 다산은 인이 이치가 아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해주는 ‘행위’라고 해석했는데, 아마 손암도 그런 해석을 내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급의 학문 수준, 동급의 개혁과 변화의 마인드를 지닌 형제지기, 그들의 경학(經學)도 그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같은 핏줄에 같이 배운 학문 (同氣同學)’ 흑산도와 강진의 먼 거리에서도 그들의 형제애는 식지 않았고, 그들의 학문경지도 그런 높은 수준에 함께 이르렀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아우, 내 아우 !” 라고 외치면서 손을 붙잡고, 등을 어루만지고 싶다던 손암의 뜻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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