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로서의 다산의 기개는 대단했습니다. 이른바 공직자의 바이블이라고 일컫는『목민심서』에는 상관의 명령이라도 법령에 어긋나거나, 백성을 위해서 이롭지 못한 것은 반드시 거절하고 듣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 열거되어 있습니다. 준법(準法)을 누누히 강조했던 다산이지만 이롭지 못한 법령이라면 절대로 지켜서는 안 된다고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위민흥리(爲民興利)’가 아닌 어떤 명령이나 법령도 지키거나 응할 필요가 없다는 논지였습니다. “내가 곡산(谷山)부사로 재직할 때, 하루는 감사가 급한 공문을 보내 은광(銀鑛)의 광부 200명을 징발하여 재령군으로 가서 장용영(壯勇營 : 정조대왕의 직할부대)에서 둑쌓는 일을 도우라는 독촉을 했습니다.

나는 답서를 보내 듣지 않았더니, 다시 내려온 공문은 더욱 엄중하였고, 보낸 편지에는 「근일(近日)」의 일은 자기 의견만 고집함은 좋지 않다. 더욱이 장용영은 다른 부서와는 다른데 어찌 감히 듣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내가 답하기를 「근일이란 현재의 임금님이 다스리는 세상이다. 왜 자기 의견을 주장함이 좋지 않다는 것인가. 다른 부서의 일이라면 그래도 따를 수도 있겠으나, 이 장용영의 일만은 만약 백성을 동원해서 원망을 산다면 현재 임금님의 덕에 누를 끼침이 작은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따르지 못하겠다는 보고를 올렸다. 감사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끝내 곡산은 덮어두고 오직 다른 고을에만 부역을 시켰다.”(戶典 ․ 平賦)

백성들을 동원하여 부역을 시키는 역역(力役)은 가능한 줄여야 하고, 하더라도 신중하게 대처하여 백성을 위하여 이로운 일이 아니면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고수했던 분이 다산이었습니다. 임금을 앞세우고, 대통령을 빙자하여 매우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부역을 깊은 고려 없이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일은 삼가 할수록 현명한 목민관이라는 것도 다산의 주장이었습니다.

그 일을 시키면 임금이나 대통령에게도 누가 되고, 덕에도 손상이 오는데, 높은 사람을 빙자하여 이롭지도 못한 부역을 시키는 일은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일에 불과합니다. 이런 통찰에 밝았던 다산이었기에 2년여의 곡산도호부사 시절은 그의 생애에 가장 자랑스러운 목민관 생활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금이나 요역(徭役)의 균등과 공평은 바로 통치의 요체입니다. 그래서 다산은 백성들의 부담이 큰 세금이나 요역에는 아무리 높은 곳의 명령이더라도 그냥 응하지 않고, 법령과 사리를 따져 합리적이지 못하면 직을 걸고라도 명령에 응하지 않았던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기록을 좋아하던 다산은 그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였는가를 기록으로 자세히 남겨 역사의 거울이 되게 하였습니다. 요즘의 목민관들도 한번 쯤 살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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