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동안 국가 발전의 대안 모색에 생애를 걸었던 다산의 세 번째 과제는 국가적으로 기술의 혁신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술개발과 기술혁신에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요즘으로서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200년 전의 조선시대에 그런 점에 착목했던 다산의 혜안은 역시 높은 수준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인이라면 이(理)와 기(氣)를 논하고 이발(已發)이냐 미발(未發)이냐를 따지면서 인(人)과 물(物)의 성품이 같으냐 다르냐 라는 성리학적 논쟁에만 온 마음을 기울이던 시절이었는데, 실학자 일군(一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다산이 유독 그런 주류(主流)적 논리에서 벗어나 기술개발 문제에 열성을 보였던 점은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애초에 다산은 「기예론(技藝論)」이라는 논문을 통해,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기예’를 통한 기술개발이 없다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다고 여기고, 기술도입이나 기술개발을 통해서만 인류의 역사나 문화, 문명이 발전한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기술개발 이론까지 합하여 기술의 도입이나 개발이 없는 국부의 증진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지니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국가개혁의 마스터플랜이라고 말해지는 『경세유표』를 통해 정부기구의 개편을 요구하고, 「이용감(理用監)」이라는 새로운 부서를 만들어 청나라로부터 기술도입과 국내의 기술개발을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농기구를 개발해야만 농민의 수고가 줄어들고 소득의 증대가 가능하고, 병기를 개발해야만 강병이 육성될 수 있으며, 의술이 개발되어야만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수명이 연장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박석무 이사장
중화주의와 숭명사상에 빠져 청나라를 무시하면서 그쪽에서의 기술도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시절에 청에서라도 기술을 도입하자는 그의 북학주의는 역시 현실적이고 실리적이었습니다. 더구나 기술의 개발이나 혁신에 필수적인 사항의 하나가 수학교육의 강화에 있다고 믿고 「산학서(算學署)」라는 기구를 개편하여 국민교육에 수학공부를 강화해야 함을 역설한 점도 특별한 주장이었습니다. “온갖 공업기술의 정교함은 그 근본이 수리학의 연구에 있다(百工之巧 皆本之於數理).”라고 주장한 것은 탁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과학의 근본이 수학에 있음을 다산은 이미 꿰뚫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단한 학자로서의 안목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생각 바꾸기, 법제개혁, 기술개발, 이런 세 가지 개혁과제를 분명하게 내걸고, 다산탄생 250주년을 맞는 금년, 다산을 본받아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어의에 부합되고 근래에 논의되는 2013년체제, 한국사회를 총체적으로 개혁하자는 논리와도 부합되는 ‘신아구방(新我舊邦)의 세상이 오게 될 것입니다. 다만 다산시대에는 없었던 분단체제 극복과 선거혁명의 문제는 추가해야 되겠습니다.

저작권자 © 남도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