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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아서 아름다운 것들

                                                                        유지나( 영화평론가)

큰 것, 새 것, 비싼 것. 한국 사회에서 선호되는 기본적 속성들이다. 큰 차, 큰 평수의 최첨단 아파트, 청문회 논의 대상까지 된 비싼 루이뷔통 백 … 이런 것을 소유하면 자신이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처럼 보여 기분이 근사해지는 것일까? 하긴 차의 크기에 따라 운전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에 무리해서라도 큰 차를 탄다는 속설은 크기 콤플렉스의 상식화를 증명해준다. 심지어 한때 논란을 일으킨 ‘루저 발언’도 남자를 크기 콤플렉스로 재단하는 황당무계함을 드러내준다.

최근 한 케이블 방송이 4억 원대로 치장한 명품녀를 보여주는 쇼를 했다. 비싼 명품을 두르는 것은 돈의 크기 과시로 선망의 대상이라고 판단한 결과이리라. 그런데 막상 방송이 나가자 그녀의 돈 크기 출처를 두고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나왔는가에 대한 공방은 세금문제를 거쳐 마녀사냥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부의 크기를 추종하는 한국사회의 가식병이 낳은 한심하고 슬픈 생쇼판이다.

                  큰 것 강박세계에 등장한 작은 소녀 ‘아리에티’

바로 그 와중에 <마루 밑 아리에티>(요네바야시 히로마사)라는 작은 인간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본다. 메리 노턴의 오래된 영국동화 <빌려쓰는 종족! The Borrowers!)>가 보드랍고 귀여운 작은 인간 종족의 삶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심장수술을 앞둔 소년이 시골 외갓집으로 요양하러 온다. 척 보기에도 심약하고 우수에 가득 찬 소년은 한적한 시골집에서 산책하고 몽상하며 외롭게 지낸다. 그런데 언뜻 마주친 아리에티의 존재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엄지손가락 두 배 정도의 크기에 빨래집게로 단출하게 머리를 동여맨 소녀 아리에티! 커다란 인간들이 벌레취급하며 없애버렸기에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이 작은 종족은 인간의 물건을 빌려 쓰며 마루 밑에 산다. 이들은 빌렸다고 하지만 실은 그저 몰래 가져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각설탕 한 조각, 휴지 한 장의 가치를 모르는 인간에게 이런 작디작은 물건은 작은 인간들에겐 오래오래 쓸 필수품이니까.

어쩌면 혼자 남을지도 모르는 딸에게 생존능력을 키워주려고 인간의 집으로 모험을 떠나는 아버지의 복장은 오지 탐험가처럼 보인다. 헬멧을 쓰고 자일을 두르고 비상 후레시로 무장한 아버지, 인간의 집 바닥에서 주은 작은 가봉용 핀을 마치 창처럼 끼고 행군하는 아리에티. 그들의 눈에 비친 인간세상은 <걸리버 여행기>의 거인국을 연상시킨다.

소년에게 작은 소녀의 발견은 진부하고 무력감에 빠진 삶에 활력을 준다. 또 다른 세상, 또 다른 생명체, 특히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의 발견이 주는 황홀감! 그녀 앞에 서면 그는 약해빠진 소년이 아니라 힘 많은 커다란 인간이기에, 심지어 이 작은 존재들을 구해줄 수도 있다.

                  본디 우린 우주 속 작디작은 존재가 아니던가!

불현듯 슈마허의 명언,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현실태를 목격하는 느낌이다. 슈마허는 끝없는 성장주의에 불행해진 사람들을 부의 크기 강박으로부터 해방할 경제학적 출구를 모색했다. 그리하여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경제학의 핵심을 작은 것에서 찾았다. 작은 것, 적은 것이 희망이며, 인류 공생의 미래이기에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것이리라. 자, 이제 돌아보자. 작은 것을 좋아하는가?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사는가?

미국에 가면 늘 놀랍고 불편한 것이 음식을 너무 많이 주고 너무 많이 버린다는 크기의 경제학이다. 수퍼마켓 크기도 너무 크고 진열된 물건 종류도 너무 많아 현기증이 난다. 한국도 유사하다. 큰 수익을 위해 프렌차이즈를 내건 대형할인점이 오래된 작은 가게들을 죽이고 있다. 그게 자유시장의 법칙이라고 전문가들이 커다란 시스템을 가진 승자독식 세상을 마치 진리인양 설파하고 있다.

커다람에 둘러싸여 현기증을 느끼는 나나 나와 유사한 이들은 아리에티를 보며 동병상련의 두려움을 갖는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실천해야 덜 불행해지니까. 게다가 우린 우주 속의 작디작은 존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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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유지나

· 이화여대 불문과
· 파리 제7대학 기호학전공. 문학박사
· 영화평론가.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 세계문화다양성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학술훈장 수상.
· 저서 :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
· 2008년부터 ‘유지나의 씨네컨서트’, ‘유지나의 씨네토크’를 영화, 음악, 시가 어우러진 퓨전컨서트 형태로 창작하여 다양한 무대에서 펼쳐 보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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