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후반기의 증후군일까요, 아니면 이 나라의 고질적인 부정부패의 한 단면일까요. 연일 터지는 권력기관의 비리 백화점이 온 세상에 알려지면서, 보도를 보고 듣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감사원이나 금융감독원은 바로 부정과 비리를 감시하고 척결하는 파수꾼이건만, 그들 단체의 소속원이 생선을 지키는 고양이로 변해버리면, 국민들은 누구를 믿고 일을 하고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입니까. 더 높은 권력기관도 무관치 않다는 보도를 보면서, 부산저축은행 사건의 결말이 자못 궁금하기만 합니다.

다산은 18년의 긴긴 유배생활 중에서도, 하루도 편히 쉬거나 마음 편하게 지내지 못했으며,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나라와 세상을 걱정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타락하고 비리와 부패가 들끓던 그 당시의 조선, 다산은 산 속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하면서도 풍진의 번뇌를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꽃이 진 다리 밑에 사람은 안 보이는데
 숲 사이로 솟는 달이 수레바퀴 같구나.
 저 먼 만경창파의 금물결 끌어다가
 풍진의 온갖 먼지를 쓸어버리고 싶어라.

 花落溪橋不見人     隔林新月似車輪
 思將百頃金波水     滌盡閻浮萬斛塵

산 속에 숨어 살면서 이런저런 감흥을 못 이겨 읊었던 『산거잡흥(山居雜興)』이라는 20수나 되는 장편의 연작시 중의 시 한 수입니다. 봄이 가느라 꽃은 다 지고, 다리 밑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새로 솟는 달의 모양새가 그렇게 아름답건만, 달의 아름다움보다는 온갖 부정과 비리로 가득한 풍진세상의 더러운 먼지를 씻고 싶다는 다산의 ‘상시분속(傷時憤俗)’과 ‘애민우국(愛民憂國)’의 시정신이 그대로 드러난 시입니다.

그렇게도 부패한 세상이 싫고 밉던 다산, 200년이 지난 오늘에도 부정과 부패는 사라질 줄을 모르니 이 얼마나 답답한 세상인가요. 감독기관이 제대로 일하고, 인재를 바르고 정당하게 등용해도 이런 부정과 비리가 계속될까요. 고양이에게 생선을 지키게 하지 말고, 정직한 파수꾼을 제대로 세워 생선을 지키게 해도 이런 세상이 계속될까요.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던 세상이기에, 다산은 불교의 이론에는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세상이 싫어, “남은 인생 불교의 교리 배우는 노승(老僧)이나 되고 싶네(餘齡要學老頭陀)”라고 20수의 마지막 시의 끝 연에서 읊었습니다.

다산은 이 시의 해제를 썼습니다. “중과의 관계로 지은 시여서 선어(禪語)를 썼다. 불교의 가는 길이 좋아서가 아니라 세상의 일에 대해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어서 그랬다”라는 글입니다. ‘염부(閻浮)’나 ‘두타(頭陀)’가 모두 불교용어입니다. 부패한 세상이 싫기만 하던 다산의 심정이 요즘 시절에도 느껴집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저작권자 © 남도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