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애의 외딴 바닷가 마을, 강진은 조선의 땅 끝에 위치한 벽지였습니다. 그런 외지고 힘든 고장에서 18년의 귀양살이를 지낸 다산, 그런 고단한 삶에서도 자신보다 더 어렵게 살아가던 백성들이 당하던 참상에 가슴아파하던 그의 인간 사랑의 정신을 접하면 가슴이 막히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되돌아보면 나야 죄지은 몸으로 귀양 와 엎드려 지내니 인류의 대열에도 끼지 못하는 신세(未齒人類)여서 흉년의 구황식품이라도 나라에 바칠 길이 없고, 백성들의 참상을 그림으로 그려서라도 상소하는 ‘유민도(流民圖)’ 한 장 바칠 수 없다.”라고 탄식하면서 북받치는 마음을 달래려고 백성들이 당하는 참상을 시로 읊는다고 했습니다.

▲박석무 이사장
     다산연구소
이런 처지에서 읊었던 다산의 시는 당대의 절창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던 「전간기사」라는 시첩으로 묶은 시집이었습니다. 1809년은 기사(己巳)년, 귀양살이 9년째로 다산초당에서 지내던 때인데, 그해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살아갈 길이 막막하던 때였습니다. 탐학한 관리들은 그런 속에서도 착취만 일삼고 있었기에, 분노한 다산은 보고 느낀 그대로 시를 읊었습니다.

「시랑3장(豺狼三章)」이라는 시는 제목부터 가슴을 쓰리게 합니다. 관리들을 승냥이와 이리떼에 비유하여 착하고 순한 짐승들을 잡아먹는 탐학상을 폭로하였습니다.

“…우리의 논밭을 바라보시게. 얼마나 지독한 참상인가요.   視我田疇 亦孔之慘
백성들 이리저리 떠돌다가 구덩이 속을 가득 메우네.          流兮轉兮 塡于坑坎
부모 같은 사또님이여! 고기랑 쌀밥이랑 잘도 드시며          父兮母兮 粱肉是啖
방안에는 기생 두어 연꽃처럼 곱고 예쁘네.”                      房有妓女 顔如菡萏

유리걸식하던 굶주린 백성들은 구렁텅이에 빠져 숨져 가는데, 백성들의 부모라는 사또님은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즐기고 살아간다는 마지막 구절의 대결구도가 너무나 극명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난과 흉년에 못 견디던 백성들, 탐학한 관리들의 횡포까지 겹쳐 죽는 일 말고는 다른 길이 없는데, 백성을 먹여살려낼 책임이 있는 사또는 예쁜 기생이나 안고 고기와 쌀밥으로 삶을 즐긴다는 모순된 사회구조, 그런 양극화 현상은 언제쯤 해결될 날이 있을까요.

「승냥이와 이리」라는 시에 다산이 직접 기술한 해설은 너무 기막힌 사연이어서 옮기기조차 두렵습니다. 관검(官檢)으로 당할 피해가 두려워 마을주민 자체적으로 치사사건을 해결했건만, 뒤늦게 관(官)에서 알고 마을에 들이닥쳐 3만 냥의 거금을 토색질해가는 통에, 두 개 마을 전체가 완전히 몰락해버리는 슬프고 서러운 사실을 시로 읊었노라고 다산은 설명했습니다. 처참한 흉년에 한술 더 뜨서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양민을 괴롭히는 관의 횡포에 분노한 다산, 그의 분노가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오늘도 양극화의 간극은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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