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글에서 화두(話頭)를 꺼내 오늘의 논리와 비교하여 귀감이 될 만한 다산의 생각이나 정신을 세상에 소개해왔습니다. 시작하던 때가 2004년 6월 초였으니 벌써 햇수로 9년 째입니다. 시작하던 때로부터 상당기간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주 5회, 200자 원고지 4~5매로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다가 다른 분야의 필자들이 합세하면서 주 3회로 줄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정기간이 지나서는 주 2회였고, 현재는 주 1회 원고지 6~7매의 글을 써서 35만의 독자들에게 보낸 글들이 모여 700회에 이르렀습니다. 받아보는 독자가 다른 곳으로 퍼나르거나 홈페이지에 직접 들어와 읽는 독자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여유당전서』라는 다산의 문집에 실려 있는 글이 중심이지만, 가끔 발견되는 문집 이외의 글에서 좋은 대목만 있으면 놓치지 않고 인용하여 풀어쓰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8년의 세월 동안 국민들에게 구체적으로 다산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 생각의 부족이나 글 솜씨의 미숙으로 다산의 뜻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적도 많았겠지만, 성심성의껏 올바르게 알리려는 저의 정성된 마음을 이해해주는 독자들이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난해한 다산의 고경(古經)에 대한 해석, 번역하기 쉽지 않은 다산의 시들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해 제대로 알리지 못한 부분이 있겠으나, 바르게 알리려고 노력했던 점만은 인정해주리라 믿습니다.

   
▲박석무 이사장
700회 기념으로 꼭 풀어쓰고 싶은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최근에 방영된 역사스페셜이라는 프로를 시청하다가 다산의 천주교신자 여부에 대하여 불확실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더구나 다산의 큰 아들인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이 말년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내용으로 결론을 맺는 것을 보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사문제를 계기로 정약용·이가환 일파가 종교와 과학을 혼동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교회와 단연히 결별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반영한 것인가? 단순히 배타적이며 피화적(避禍的)인 행동으로 규정할 수 없다. 다산은 공예와 기술은 외국으로부터 배워야 하지만 도덕과 의리는 자주적으로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의 소위 서학에 대한 자기 비판적 태도를 표명한 것이었으며 이 사상을 계승한 ‘내수외학’의 표어는 민족의 자주 발전을 위한 개화운동에서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였다”(『실학파와 정다산』최익환 저. P.288)


서양의 과학기술과 서양의 도(道)인 천주교를 분명히 구별하여 도는 우리 동양, 즉 조선의 유교를 신봉하고[內修] 천주교는 반대했으며, 과학기술은 밖에서 배운다는[外學] 뜻을 천명하였는데, 천주교를 신봉했다면 다산의 논리는 파탄의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한말의 개화운동에 커다란 의의를 지닌 다산사상이 그렇게 파탄난다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은 어디서 찾으란 말입니까. 『여유당전서』를 제대로 읽은 최익환은 분명히 옳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500권이 넘는 다산의 저서 어디에 천주교 신자의 낌새가 나타난 부분이 있는가요. 정학연이 신자였다는 엉뚱한 주장은 어떤 이유에서 연유한건가요. 사실을 모르는 분들, 다산탄생 250주년인 금년부터라도 그런 미망에서 벗어나 다산을 제대로 발견해주시기 바랍니다. 천주교에 빠졌던 한 때가 있었으나 제사문제를 계기로 천주교와는 완전히 결별했음을 이번 기회에 분명히 밝힙니다. 자신의 글에서 그렇게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어떤 자료로 그의 주장을 뒤엎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다산 자신의 주장을 믿어야 우리나라의 역사가 바르게 해석됨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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