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의 잘한 일을 적는다면 몇 편 되겠지만, 너의 숨겨진 허물을 기록하면 책은 끝이 없으리. 너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 행실을 살핀다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1. 오랜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은 1822년 회갑을 맞이하여 자신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정리한 ‘묘지명’을 스스로 짓는다. 그는 권력과 학문의 주변부로 유배 갔던 상황을 오히려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광대한 학문적 업적을 성취하였다. 특히 유교 경전인 사서ㆍ육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ㆍ『牧民心書』ㆍ『欽欽新書』)로 대변되는 정치사회적 개혁안은 유명하다.

2. 하지만 학문이 아닌 ‘실존’의 자리에서 정약용은 부끄러워한다. 남이 모르는 내면의 숨겨진 허물, 경전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못하는 실천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60년이 모두 ‘죄를 지어 후회스런 세월[罪悔之年]’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사람이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실존적 변화의 힘을 ‘정직한 후회’에서 찾았다. 그래서 성인(聖人)도 허물이 전혀 없는 신적인 인격이 아니라 후회를 잘해서 허물을 반복하지 않는 ‘반성적인 인격’으로 해석한다.

3. 우리는 살아가면서 허물이 없을 수 없으며, 따라서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의 위기상황을 모면하려는 자기변명으로 후회가 쓰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국사회를 보면, 지위가 높을수록 자기 잘못을 정직하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누구나 시인 윤동주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노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분들이 ‘염치(廉恥)’를 잊어버리는 건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 아닌가?


글쓴이 / 임부연
· 서울대학교 강사
· 제5회 다산학술상 우수연구상 수상
· 공저 : 『스승 이통과의 만남과 대화 : 연평답문』, 이학사, 2006
『유교와 종교학』, 서울대 출판부, 2009
· 공역 : 『시경강의(詩經講義)』 1-5, 사암, 2008
· 저서 : 『중국철학 이야기3 : 근ㆍ현대-유학의 변혁, 서양과의 만남』, 책세상, 2006
『정약용 & 최한기 : 실학에 길을 묻다』, 김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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