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남도방송] 최근 유명한 방송인이자 작가였던 한 여성의 자살은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평소에 그 여성은 행복전도사라는 닉네임으로 주위의 불우하고 패배주의적인 삶에 찌든 이들에게 긍정적이고 낙관주의적인 가치관의 정립을 주입시키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제공하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개인적으로 그녀의 육체에 밀려오는 700여 가지의 고통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삶으로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의 자살은 그녀를 알고 있는 주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 확대될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베르테르의 효과로 불행한 일들이 사회에 번질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를 낳지나 않을지 심히 우려되고 있다.

그녀는 과연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또 왜 이런 방법을 택해야만 했던 것일까? 이번 일을 토대로 우린 그 사람이 그동안 우리에게 전달한 행복의 전도사로서의 '역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돌아 보게 한다.

어느 단체의 장이 가지고 있는 '직분'과 '역할', 또 다른 직분과 역할에 대한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불신을 제기하게 만든다.

언론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언론의 역할이 국민의 알권리를 대변해준다는 미명하에 벌이는 일부 기자의 탈레반 운운하는 자기 주관적인 기사의 지향은 심히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순천시의회 의원 일부 중의 과거 이력을 현재 의원으로서의 업무진행과 연관 지어 문제를 삼는 칼럼을 게재한 지역의 모 인터넷 신문은 언론인의 자세와 역할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줄 담배를 즐기던 고 이주일 씨는 금연운동으로 자신을 반추시키며 대중들에게 호소해서 많은 이들에게 금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를 남겼다.

시장에서 악착같은 똑순이로 한 푼 한 푼 모으던 돈을 장학금으로 쾌척하는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보면서 드러나는 삶의 철학적인 메시지는 우릴 이웃을 돌돌아 보게 하는 메시지는 아닐까 생각한다.

이는 모든 행위의 진실은 어느 상황이 종결된 후에 평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 특히 최근 운명을 달리한 행복의 전도사가 했던 메시지는 그의 글을 추앙하는 많은 국민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그의 사후 평가는 글쟁이로서의 옳다고 볼 수 없다.

이렇듯 글쟁이, 특히 진행형인 언론인들의 역할은 사후 평가가 아닌 현실이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언론인으로서 그들의 우려가 걱정되는 바는 이해 하지만 언론인으로서의 섣부른 결론은 또 하나의 가십과 카더라 논리의 무책임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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