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준비에 바쁜 봄 시골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사람들은 시시하다고 할 것이야!'

봄볕이 따사한 날이면 누구나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여수는 도농복합도시여서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농촌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무작정 한적한 시골동네를 향해 걸어도 걱정이 없다. 바로 가까이에 시내버스가 다니거나 임도가 놓여져 있다.

4월 2일 토요일, 우리 여수풀꽃사랑에서는 시골 동네 밭둑을 수놓고 있는 흔한 들꽃을 찾아 걸어보기로 하였다. 높은 산이 없어서 어린 초등학생들까지도 함께 할 수 있어서 가족 나들이로도 마땅할 것 같다.

먼저 오후 2시 여천전남병원주차장에서 만나서 무선산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선녀가 내려와 춤을 췄다는 무선산은 가파르지만 우리가 걷는 길은 새로 뚫린 무선산 둘레길이다. 무선지구 마을을 보면서 30분 정도 걸으면 많은 시민들이 운동하러 오는 체육시설과 약수터를 만난다.

이곳에서 다시 죽림과 무선 경계쪽으로 둘레길이 이어졌다. 편백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이 길은 자갈이 많아서 먼지를 날리지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선다. 죽림 휴먼시아 아파트까지 걸으면 죽림리 상금 마을이다.

죽림리 상금마을

'황토와 통나무' '예다운'

큰길따라 조산마을에서 풍류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조산저수지, 복산저수지 곁을 따라 야트막한 산을 향해 나있는 길을 따라 걷는다. 오래 되지 않았지만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많이 자란다. 특히 가정집 정원에서나 볼 수 있는 목련나무가 드문드문 보인다. 위치 좋은 곳에 누군가 산장을 만들고 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풀꽃과 나무들로 잘 꾸며진 오리전문 식당 '황토와통나무', 전통 찻집 '예다운'이 나온다. '누가 이 구불구불 산길 끝, 산꼭대기에 통나무집, 아름다운 집을 지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통나무와 황토로 지은 집에서 맛있는 생오리구이를 먹고, 또, 통나무로 된 집에서 전통차를 마시면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붙잡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혀끝을 자극하는 생오리구이 맛에 풀꽃을 보면서 시골길을 걸으면서 생각나던 어머니까지도 잊어버린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3월이 되면 담임 선생님이 아닌 음악선생님을 처음 만난다. 그 때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교과서에 처음으로 나와 배웠던 봄의 노래, '봄처녀'를 부른다. 까까머리 중학생처럼 다소곳이 두 손을 마주잡고 목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른다.

'봄처녀 제오시네 새풀옷을 입으셨네,

하얀구름 너울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가'

소라면이지만 신시가지가 된 곳이 죽림주택단지이다. 이곳 죽림은 옛날 말 그대로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죽림청풍(竹林淸風) 고사용출(高士聳出)’은 예로부터 뛰어난 선비가 많이 배출된 마을을 뜻한다. 아마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죽림은 여수군이 설립될 때 덕안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금곡·차동·덕현·중금·하금·신송리를 합하여 소라면에 편입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정리인 죽림리가 되었다. 

처음 ‘쇠실’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금곡(金谷)’이라 하였다. 금곡을 위·아래 마을로 나누어 상금마을 과 하금마을이 되었다. 이름 그대로 쇠실 마을은 옛날부터 철이 많이 나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을 채굴하던 광산까지 여러 군데 들어섰다. 그러나 경제성이 떨어지면서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었다. 하금 마을 아래로 죽림저수지가 만들어져 관기들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산자고와 같은 정겨운 풀꽃

상금마을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골짜기가 아닌 시내가 되었다. 불과 7-8집 정도가 모여 살고 있지만 곳곳을 파헤치는 것으로 보아서 옛날 마을 모습은 찾을 길이 없을 것 같다.

마을 밭과 묘지에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풀꽃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산자고가 뾰족뾰족 얼굴을 내밀어 꽃잎이 휘청거리고 있다. 양지바른 곳에 양지꽃과 광대나물, 개불알풀이 작은 꽃잎을 자랑한다. 여기저기에서 나도 꽃이라고 우기면서 끌어당기는 풀꽃들이 있어서 봄의 언덕은 풍성하기만 하다.

매화와 진달래가 화창하게 피었고, 나뭇잎들은 오리나무를 비롯하여 새싹을 돋기 위해 힘찬 발돋움을 한다. 물이 오를 때로 오른 이 나뭇가지에 잎이 가득하면 자연의 힘은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 분명하다. 왜 사람들은 이런 논밭도 별로 보이지 않는 산속 길까지포장을 하였는지 울화통이 터진다. 흙길을 걸으면 상쾌한데 이런 시멘트 포장은 짜증이 나고 금방 피로를 느낀다.

현천 마륜마을

상금마을을 지나면서 들어서는 곳은 현천 마륜마을이다. 마을 이름은 여수군이 신설되면서 처음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 외지라는 마을 이름이 좋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마을 뒷산의 이름인 천마산에서 따 마륜이라고 지었다.

천마산은 철마산이라고도 하며, 일본이 정기를 끊기 위해 설치했다는 쇠말뚝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이 전설은 1910년을 전후로 측량 기점을 표시하기 위해 산 정상에 설치했던 표시석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인 것 같다. 

조산마을과 탄화맥

마륜마을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덕곡저수지를 만난다. 덕곡마을은 덕양리이다. 덕양삼거리에서 섬달천쪽으로 올라오면 만나는 길이다. 달천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조산마을이다.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매화나무 아래에는 쑥을 캐는 아낙, 할머니가 보였다. 이쯤에는 봄처녀들이 바구니를 들고서 쑥을 캐야할텐데 농촌에서 처녀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저 쑥들을 캐서 시골학교에 근무할 때 아이들과  '쑥버무리'를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 유적 발굴에 따라 이곳 조산마을에서 탄화맥, 즉 탄 보리를 발굴하였다. 조산마을 주거지는 여수반도에서 최초로 조사된 원삼국시대 후기의 주거 유적이다. 탄화맥은 형태와 크기가 다양하여 길이 6.5~8.5mm, 너비 3~4mm, 두께 2~3mm 크기이고, 계측치로 본 너비는 2.3㎜ 정도이다.

조산마을에서 발굴된 탄화목으로 보아서 벼보다 보리가 이 지역의 입지 조건에 더 적합한 생산 곡물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보리는 여주 흔암리·광주 신창동·김해 부원동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흔암리 유적을 통해 보리는 우리나라에서 적어도 청동기시대 전기에 재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보리는 BC 2세기경의 신창동 유적 시기를 거쳐 부원동 유적 시기가 되면서 해안 지방 등 거의 전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조산 주거지 출토 탄화맥은 부원동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시기로 판단된다.

송고 : 여수갈매기 한창진/ 여수시 선원동 금호아파트 5동 1203호 010-7617-3430 Email:yosupi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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